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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다종의 역할 (평론가 성혜인)
25. 12. 8.
다종의 역학: EMT컴퍼니 <화성학 실습> 쇼케이스 참관기
성혜인

최근 축제에서 유행하는 워크숍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양가적이다. 기본적으로 워크숍은 관객을 참여자로 끌어들여 축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질문을 논의하고 담론을 확장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이유만으로 과도한 의미가 부여되거나, 단지 워크숍이 동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축제의 진정성이나 신뢰도가 보장되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결국 워크숍에서 주제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함께 한다’는 감각 속에서 무 엇이 생성되고 교환되었는지를 가늠해 보는 일이지 않을까.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는 음악 프로그램의 비중이 컸다. 사운드를 매개로 자신의 질문을 확장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워크숍의 일환으로 마련된 <화성학 실습>은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화성학은 화음의 관계와 상호작용, 즉 화성(和聲, Harmony)에 대한 학문이다. 음의 조화, 진행의 안정성을 견지하기 위한 일종의 음악적 질서인 셈이다. 동시에 하모니(Harmony)는 조화와 어울림을 지시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양음악의 근간을 이루는 화성학이 모든 음악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화성학은 기본적으로 서구 중심적 음악 규범이다. 흔히 ‘클래식’이라 일컫는 유럽 음악의 전통 안에서 유효하지만, 비서구 음악을 설명하거나 조형할 수 있는 언어는 아니다. 화성학을 ‘음악’과 ‘조화’의 근원을 이루는 개념으로 위치 지을 때 생기는 미묘한 배제의 감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전통적인 화성학에서 벗어난 음악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 화성학을 조화라는 이상과 연동시키는 점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고, 사회적 편견이 내재한 화성학의 여러 법칙들이 현대 사회의 면면을 다루는 도구로 유용한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음악의 가장 근원적 원리인 화성학으로 되돌아가, 어떻게 함께 울리고,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를 실험”한다는 소개글에서 워크숍의 내용과 목적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서양음악을 근간으로 하는 작곡가에게 화성학은 현대 사회 속 조화와 공존을 사유할 수 있는 가장 익숙한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왜 하필 화성학이었을까”라는 의문이 여전했기 때문에 <화성학 실습>이라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확정적인 제목 앞에서도 내용이나 형식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심 서양음악의 기본 체계이자 조화의 원리를 상징하는 화성학의 언어를 낯설게 함으로써, ‘조화’라는 서양 근대적 개념을 다시 질문해 보는 시간이 되진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조화는 무엇일까. 질서일까. 상태일까. 감각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조화에서 흔히 대립항으로 언급되는 긴장이나 갈등 같은 불안정성은 완벽하게 제 거되거나 해소되어야 할 대상일까. 아니면 조화의 기준과 질서를 재정의하게 만드는 새로운 조건일까. 만약 그렇다면 조화란 끊임없이 질서를 점검하면서 재맥락화하는 과정일까. 다양한 질문이 산재한 가운데 <화성학 실습>이 궁극적으로 대결하려는 질문이 더욱 궁금해졌다.
<화성학 실습>은 워크숍으로 소개되었지만, 실제로는 짧은 공연 형식을 갖춘 쇼케이스로 진행됐다. <화성학 실습>에서 신체의 언어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공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무대에 등장한 퍼포머는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며 관객들에게 호흡과 발성을 직접 따라 해볼 것을 권한다. 관객들은 입과 목의 근육을 풀고, 구획된 객석에 따라 각각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네 개의 성부를 맡아 합창을 하며 조화로운 울림 속 하나의 일원이 된다. 이는 <화성학 실습>에서 화성학이 사회적 관계의 메타포로 변환되는 첫 순간이기도 하다.
이후 전통적인 화성학의 법칙을 하나씩 텍스트로 나열하며 옴니버스 형식으로 ‘ 실습’의 과정을 이어간다. 자리바꿈, 7화음과 해결 등 음의 위치와 진행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의 변화를 퍼포머들의 신체로 변환해 낸다. 여기서 퍼포머들의 신체는 화성학의 법칙을 상당히 직관적으로 매개한다. 오선보를 은유하는 듯한 바닥의 흰 줄,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퍼포머들의 움직임은 음의 이동을 가시화하면서도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감각적 정보를 전달하며 다양한 관계의 역학을 보여준다. 화성학을 인간의 신체로 매개하다 보니 각 장면에서 조형하고자 하는 조화나 갈등 같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은유가 상당히 직접적으로 감각되는 측면도 있었다.
음악도 퍼포머의 움직임만큼이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화성학 실습>에서는 화성학의 법칙을 답습하기보다 의심하거나 벗어나 보려는 시도가 다수 포착된다. 예컨대 화성학에서 성부 간 음역을 침범하는 건 금기다. 퍼포머는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역을 맡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무대로 소환한다. 이어 음향 기술을 통해 낮은 음역대의 목소리를 구현하며 화성학의 금기를 넘는다. 성별과 음역 사이에 고착된 위계를 흔드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조화의 정의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전통적인 ‘클래식’의 음악적 질료와 문법에서 벗어난 사운드를 제시하면 서 화성학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질문에 상당히 즉각적이고 명료한 돌파구를 내놓는다.
화성학을 매개로 사회를 말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만큼 <화성학 실습>은 “화성학은 세계를 조화롭게 하고 있는가”라는 거시적인 질문으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퍼포머의 수행으로 변환된 다양한 음악적 전위는 사회에 산적해 있는 불평등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조화는 엄밀한 규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상태일 수도, 규칙에서 벗어난 음들이 만들어 내는 긴장의 순간일 수도, 화성학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새로운 질서를 창안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듯 말이다.
<화성학 실습>은 짧은 쇼케이스였던 만큼 창작 과정에서 중간 결과물을 공유하고 방향성을 점검하는 자리였다. 작품으로서의 완결성보다 창작에서 핵심이 되는 아이디어나 문제의식, 혹은 주제나 형식을 탐구하는 방식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한편 쇼케이스라는 형식을 빌려 과정으로서의 결과물을 공유하려는 결정 자체가 중요한 발화로 느껴지기도 했다. <화성학 실습>을 보면서 몇 가지 질문을 갖게 되었는데, 그 질문들은 자연스레 무대에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의 낙차를 떠올리게 했다.
우선 <화성학 실습>에서 ‘화성학’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실습’이었다. 실습은 실제 현장에서 습득한 이론을 수행해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습은 이론의 반대항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론에 종속된 것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론보다 훨씬 확장된 개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실습은 필연적으로 시행착오, 실패, 미완의 상태를 동반하고, 이론으로 해소되지 않는 예외와 불완정성을 간파해 나가며, 시간과 경험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앎의 영역을 더듬어 나가는 과정이다. 이론과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실습은 판단과 적응 같은 상당히 감각적이면서도 다양한 층위의 수행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화성학만큼이나 실습이라는 행위도 조화를 질문하는 데 유효한 틀일 수 있을까. 모든 퍼포머와 제작진이 화성학을 함께 공부하며 작업을 이어온 만큼, 이후 과정에서도 다양한 리서치가 병행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쇼케이스를 기반으로 완성될 작품이 화성학에 대한 리서치—도큐멘테이션, 인터뷰, 워크숍 등—를 교육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수준에 머무를지, 혹은 실습이 지닌 고유한 수행성을 공연예술의 문법으로 번안해 제시할지 호기심이 생겼다.
또한 화성학은 기본적으로 음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임에도 무용이라는 매체의 사용이 상당히 두드러져 보였다.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계성을 추상화하면서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현존하는 신체의 힘이 동원된 것으로 보였지만, 이러한 시도가 작업의 내적 논리보다 시각적 정보의 배치와 점유로 이해되는 순간도 있었다. 무용, 연극, 음악, 텍스트 등 다양한 층위의 장치들이 얼마나 수평적이고 충실하게 하나의 작품으로 구조화 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처럼 여전히 빈칸으로 남아 있는 질문이 산재했지만, 그 흩어진 질문들 사이로 조화란 무엇인지, 오늘날 조화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끈질기게 묻겠다는 태도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음악으로 사회를 사유하겠다는 의지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거대한 질문을 여기 이곳으로 불어내려는 시도는 어디까지 나아가게 될까.
[출처] 한국문화예술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