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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화성학을 감각하는 법
25. 12. 30.
[연출가 김재훈 인터뷰]
화성학을 감각하는 법
2025년 10월 10일 및 17일, EMT사무실
(이민희 진행)
👩💻이민희: 신작 <화성학 실습>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일단 ‘화성학’이라는 음악이론을 무대화 하신 아이디어가 눈에 띕니다. 기획의도가 있을까요?
🗣️ 김재훈: 화성학을 처음 접하고 공부할 때 화성학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저는 예술고등학교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쉬는 시간에 오선보에 화성학 문제를 풀고 있으면 친구들이 저를 좀 신기하게 보기도 했습니다. 그게 뭐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열심히 설명을 해주어도 친구들은 잘 이해를 못하는게 당연하니까요. 그럴 때 ‘자리바꿈’, ‘5도 병행 진행 금지’ 같은 규칙을 사람의 움직임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설명하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언젠가는 이런 원리를 무대에서 직접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구체적으로 들기 시작했고요. 화성학에 나오는 여러 이론은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재미있는 부분이 참 많은데, 오선보나 책으로 접하면 역시 관심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서점이나 도서관, 인터넷으로도 충분히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지만, 저는 이것을 공연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에요. 그 방식이 더 매력적으로 잘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민희: SPAF의 워크숍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쇼케이스가 공연됩니다. 이 공연에는 관객이 ‘합창’을 배우는 파트가 포함되어 있고, 사전에 스텝들과 퍼포머가 모두 모여 화성학을 미리 공부하는 워크숍을 여러차례 진행했습니다. 특히 다함께 ‘화성학’을 정말로 공부하고 공연을 만든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김재훈: <화성학 실습> 쇼케이스는 관객분들에게 화성학을 설명해 드리고 함께 감각해 보자는 작은 아이디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화성학이 가장 기초적으로 구현된 방식인 합창을 통해 같이 노래를 해보면서 서서히 서양 전통음악 기반의 작곡가들은 어떤 원리와 방법으로 곡을 만드는지 자연스럽게 느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대화 하는 과정에서 조명, 영상, 무대디자인 파트, 연주자들이 차례로 투입되면서 점점 복합적인 퍼포먼스 형태로 확장되겠지요.
<화성학 실습>을 준비하는 강의 워크숍과 실습 워크숍에는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화성학을 기초라도 이해해야 그에 걸맞은 디자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퍼포머들은 화성학을 꼭 공부하고 이를 퍼포먼스로 옮겨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기초부터 꽤 시간을 할애해 화성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준비한 화성학 강의를 듣고, 이론을 동작으로 만들어보고, 토론을 해보기도 하고요.
👩💻이민희: ‘화성학’이라는 클래식 음악의 영역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실제 공연 음악은 밴드 사운드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김재훈: <화성학 실습>의 연주라고 하면 합창이나 현악 앙상블을 먼저 떠올리실 수 있지만, 이번 작업에서는 건반의 한 종류인 씨보드(Seaboard)와 드럼, 기타, 베이스가 함께하는 4인조 밴드 편성으로 음악을 구성했습니다. 동시대 대중음악에서 익숙하게 들을 수 있는 밴드 구성이기도 합니다. 저는 화성학의 규범을 실습하는 과정이 지금 우리가 자연스럽게 듣고 있는 음악 언어로 전달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합창이나 현악 편성도 익숙하지만 이를 통해 화성학을 표현한다면 가장 익숙한 전형처럼 들렸을 것이고, 박물관적인 인상을 만들어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업에서는 밴드 사운드와 전자음악적인 요소를 결합해, 책 속에 머물던 화성학 이론이 시각적으로는 무대의 움직임으로, 청각적으로는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다가오도록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민희: 지금까지의 설명만 들어보면 단순히 음악이론을 무대화 하는 것 같지만, 적어주신 작품노트에는 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라고까지 할수 있는 복합적인 고민이 녹아든 작품 같습니다. 그래서, ‘화성학’을 무대화해서 이끌어내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요?
🗣️김재훈: 현재 인류가 격랑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후위기처럼 전 세계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시급한데 전쟁이 끝나기는커녕 점차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점점 더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의 방향으로 밀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화성학’을 영어로 하면 ‘Harmony’입니다. 새삼 ‘하모니’ 라는 이름의 학문이 있다는 게 정말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전작 <PNO>에서 피아노가 버려지는 사회적 장면을 포착하며 공연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처럼, 최근에는 세계가 대립으로 점차 균열이 심해지고 있다고 느끼며 이 공연을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어렸을 적 배웠던 화성학을 다시 꺼내들고 싶어졌습니다. ‘화성학 실습’이라는 음악대학 과목명이 있는데, 직역해서 ‘프랙티스 오브 하모니(Practice of Harmony)’로 옮겨본다면 역시 이 말도 제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을 꿰뚫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 공연의 존재 목적은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며 ‘조화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고, 서로의 다름을 긍정하는 수행 방식을 음악을 통해 실험해보는 데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무대에서 체화할 수 있을지, 그 실습을 어떻게 풀어낼지가 이어질 작업의 핵심 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민희: 굉장히 흥미로운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화성학’의 무대화란 결국 ‘화성학 규칙’의 나열과 유사한 것이 되지 않을까요?
🗣️김재훈: 음악에는 지금 시대의 감각으로 보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규범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규범들을 동시대의 갈등과 연결해 보았을 때, 특히 화성학에서는 우리가 그 규칙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재정의해 볼 여지가 많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 작업에는 ‘음역’을 주제로 만든 장면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서양 교회 합창단은 여성의 참여가 제한적이었고, 높은 성부는 소년이나 남성의 팔셋토(falsetto)로 채워지곤 했습니다. 이후에 소프라노는 여성, 테너는 남성이라는 식의 역할 구분이 자연스럽게 굳어졌고, 그 안에서 성부 교차 자체를 조심스러워하던 전통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규범은 성별과 음역이 고정되어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고, 현대의 다양한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쇼케이스에서는 한계를 기술로 보완해, 소프라노가 베이스의 영역을 소화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기존 규범이 만들어 낸 경계를 넘는 시도 자체가 동시대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규칙을 위반해 보는 차원이 아니라, 화성학의 규범을 동시대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규칙이 훌륭한 고전을 만들어 낸 체계였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불필요한 규칙이나 엄격한 진행의 제한 같은 부분은 지금 시대의 감수성으로 다시 해석해 볼 수 있는 지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민희: 화성학의 ‘규칙’을 무대화하는 공연이면서, 화성학의 ‘당연한’ 규칙에 대해 질문하고 때로는 반기를 들며, 이를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장시키고자 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김재훈: 사전 워크숍을 진행하며 장3도와 단3도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퍼포머 한 분이 단3도가 전혀 슬프거나 어둡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대다수의 참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어했지만, 어떤 화음을 어떻게 감각하는지는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결국 음정 관계가 만드는 감정을 특정 방향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화성에 대해 ‘학습된 감정’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그렇다면 우리가 불협으로 느끼는 것이 정말로 불협이기만 한가, 불협이 반드시 불편하기만 한 소리인가, 더불어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평균율은 과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조율 체계인가, 앞으로 다양한 음악을 통합해가는 하나의 질서로 굳어져도 되는가… 이런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협화음을 인정하는 태도 자체가 결국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소리를 받아들이며 불협으로 느꼈던 소리를 다르게 감각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 작업이 귀결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민희: 말씀하신 것처럼 ‘화성학’에 대해 고민하다보면 ‘불협’이라는 매우 중요한 개념에 마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화성학 속 ‘불협’은 사실 규격화되고 이산화된 기존 음고 안에서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미분음’ 등의 영역도 무한합니다. 실제 <화성학 실습> 공연에서 ‘불협’의 표현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계획하고 계시는지요?
🗣️김재훈: ‘불협’을 본 공연에서 어떻게 표현할지는 아직 고민하고 있습니다. 음정이 고정되지 않은 노이즈 기반의 사운드로 갈지, 미분음을 어떻게 활용할지도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입니다. 다만 평균율 안에서 전통적으로 다루는 규격화된 음고의 불협은 이미 시대를 거치며 충분히 탐구된 방식이라, 이번 작업에서는 조금 더 지금의 감각에 맞는 접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통적으로 다루었던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불협의 질감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요.
그래서 아마도 질감 자체를 불협의 중요한 요소로 다루는 방향에 관심이 갑니다. 음정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소리와 어떤 특정 음정이 함께 있을 때 생기는 특유의 긴장감이 있는데, 그것이 이번 작업에 더 맞는 방식일 것 같아요. 드럼이 만들어내는 폭발적인 사운드도 불협의 질감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고, 밴드 편성은 기본적으로 음정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노이즈나 비음정적 요소로 접근하기에 더 자연스러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씨보드 건반은 미분음이나 연속적인 음 이동을 표현하기 쉬워서 기존 음계의 계단 사이를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도 하고 그리고 기타, 베이스, 드럼이 기본이 되는 록이라는 장르는 본질적으로 저항과 파열의 에너지가 강하니, 이번 작업의 문제의식과 질감이 잘 맞는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화성학 실습>이 화성학 그 자체를 비판하기 위한 작업은 아닙니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음정의 어울림과 진행을 연구하며 만들어온 훌륭한 체계이고, 저부터가 조성음악으로 음악을 만들어 온 작곡가니까요. 다만 20세기 이후 조율되지 않으며 침투한 서구의 음악적 사고가 세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여러 복잡한 문제의식들이 함께 드러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화성학’이라는 오래된 체계에서부터 다시 질문을 시작해보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